그는 훌쩍 떠나자고 했다.
그는 내게 이 여행의 목적은 시간을 멈추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있다고,
자신의 보폭과는 맞지 않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며 보라는 듯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내 가슴께로 향한다. 너도...
그의 손끝이 가리킨 내 심장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헐떡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심장위에 얹힌 듯 입고 있던 얇은 여름 블라우스가 폴폴거리며 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난 내가 헐떡거리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심장 위에 손을 올려보니 과연 헐떡거린다.
이게 정상 아냐? 심장은 이렇게 뛰어야 하는 거 아냐?
그는 왜 자꾸 반문이냐는 말과 함께
아마 아닐 걸 한다.
아닌가 보지.
대부분 그의 말이 맞다. 나는 대충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따져보면 틀린 것이 많았다.
울진 금강송 숲길은 하루에 80명에게만 개방한다.
하루는 3번길, 또 하루는 1번길
3번길은 금강송 군락지이고, 1번길은 울진에서 안동으로 가는 보부상길이라고 한다.
80명이 모여, 산을 오르기전 준비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면 숨이 빨라져야 하는데, 숨이 점점 느려지고 있어,
잠시 내가 숨이 멎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안 죽을 걸. 겨우 그런 대답을 한다.
불영계곡 가운데 쯤에서 오른쪽 옆길로 들어온 어디쯤이었다. 엄청 깊은 곳인 거다.
산이 깊으면 숲이 높다.
여름이지만, 숲은 서늘했다.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그와 나의 보폭을 맞추며 걷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평소 옆에 있는 지도 모를 만큼 조용하던 그가 말이 많아진다.
목소리 또한 또랑또랑하니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디에 있든 그의 말이 잘 들린다.
간혹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해서 몇 번 되물었지만, 그 중 몇 개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있었다.
대체로 난 전투력이 없어서 그냥 대충 넘어간다.
그는 그럴때마다 더 질문 없냐는 듯, 다그치는 듯한 눈빛으로 보지만 나는 아는척하며 시치미를 뚝.
금강송은 얼마전 기사에 났던, 남대문보수에 쓰였어야 하는 소나무이다.
그런데 대목이 떼먹었다는...
원래 금강송, 남대문에 쓰였어야 할 금강송은, 금강송 중에서도 황장목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라고 한다.
황장목은 금강송 중에서도 아주 모진 땅에서 자라 송진이 안으로 안으로 밀고 들어가 아주 밀도높게 가운데로 들어차
나무의 가운데 부분이 노랗고 단단하게 자리잡은 종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렇게 단단한 황장목도 베서 3년 동안 그늘에서 천천히 말렸다가 사용해야 나무가 터지지 않는다고 한다.
경복궁 뒷뜰 어디에는 황장목을 말리는 공간이 따로 있다고 숲해설가선생님이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런데...울진에서는 남대문에 쓰일 황장목 16그루를 서울로 보냈는데, 중간에 쓱싹한거란다.
그리고...남대문은 그냥 소나무로 뚝딱 만들어서 여기저기 터지고 있는 거란다.
한마디로 한심을 넘어 웃기는 이야기지.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재미있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뚝 끊겼다는 것이다.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시간의 의미 또한 사라진거지.
그를 툭툭치며 시간이 없어졌다고,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다. 시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멈춘 것이라고. 또 그의 말이 맞는 듯 하다. 역시!
시간이 멈추고, 내가 그곳에 머물고, 그래도 두렵지 않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다.
투명사회...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사회에서 누군가의 새로운 면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사회라고 했다.
아마 그 곳은 한병철작가가 말한 투명사회가 아니라 불투명사회, 누군가의 감춤이 인정되는 곳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나는 숲이라는 구멍이 적당히 숭숭 뚫린, 곳에서 서로를 적나라함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면서 내 보인 곳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든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곳에서 본 그는 딴 사람이었다. 실실 웃기도 했다는...
이튿날, 그 옛날 보부상이 걸었다는 1구간을 걸었다.
전날 울진군 어디 어디 지번을 가진 민박집에서는 테라스에 지붕을 얹은 집에서 잤다.
별과 달을 보면서 말이지. 전날 저녁은 학꽁치회무침에, 산초장아찌, 더덕장아찌, 먹우장아찌(?), 또 ?? 장아찌랑 먹었고,
아침도 그랬다. 앉은 자리 땅을 파면 그런 나물들의 뿌리가 닿을 것 같았다. 그런 곳이 있었다.
그날의 숲해설가는 정말 잘 생긴데다가, 목소리 죽이고, 스토리텔링 죽이고, 자작시 죽이고, 70명 인솔력도 죽이고...
나는 그렇게 어린 사람이 숲 속에서 모든 것을 해 내는 것을 처음 봤다.
동행한 70여명 중 반 이상이 여자였는데,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그 숲해설가선생님을 따랐다.
나는 금상첨화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그가 지었다는 시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 그 순간 귀에 쏙쏙 와서 꽂히는 아주 아주 잘 쓴 시였다.
보부상들이 40킬로가 되는 소금을 등짐으로 지고 오르던 오솔길에서 낭송하는 그의 시는 사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만이 숲길과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이 아닐까 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멋진 숲해설가 덕분에 그를 살짝 잊고 있었다가 말이 생각나자 그가 떠오른 것을 보면, 그는 무엇보다 내 말을 언제나 듣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말을 하면 들어주는 그... 라고 생각하려는데, 착각이다 싶었다.
안 들어줄때가 훨씬 많았다. 한마디로 개무시할 때가 훨씬 많았다. 여행 중이면 좀 달랐던 듯, 시간이 멈추면 좀 달랐던 듯.
멋진 스토리텔링 덕분에 100년전 보부상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소금을 진 그들이 되어
전혀 힘든 줄도 모르고 13킬로를 걸었다. 그들에 비하면 내 등에 진 배낭은 껌이었으므로...
도착지에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막걸리와 두부김치, 감자전을 팔고 있었다.
막걸리를 먹으면 금새 깊은 잠이 들어버리는 나는, 일부러 그걸 이용했다.
연달아 세 잔을 마시고, 버스에 오르자 바로 잠을 잤다.
아주 깊이 깊이.. 그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인줄도 모르고 잤다. 시간여행이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유일하게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잠이라고... 나는 시간이 멈춘 곳을 지나자 시간지배의 지경까지.
시간지배의 시간이 지나자 시간이 다시 가고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었던 줄도 모르고 말이다. 무슨 상관이야 싶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고, 나는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그는 그 시간이 싫어서 이곳에만 오면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그가 잠시 사라진 줄만 알면 되고,
그런 것이지. 좋았다.
이번 그와의 울진 금강송 숲길 여행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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