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의 시인이자 희곡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1986년 작품
명동예술극장
이 연극 때문에 이틀 동안 아주 행복했으며, 또한 깊이 가라앉기도 했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명동예술극장, 2010년 3월 25일(목) 저녁 7시 30분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종로영풍문고, 2010년 3월 26일(금) 오후 2시 책 구입.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다시 명동예술극장, 2010년 3월 26일(금) 저녁 7시 30분
우선 드는 생각들은 여과 없이 던진다면,
하나, 예술 하는 사람들이란...
둘, 연극이라는 것은 굿과 같구나.
셋, 그럼, 나는 뭐하는 사람이니?
[유랑극단 쇼팔로비치]는 우리에게 생소한 세르비아의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작품이다.
세르비아라는 우리나라처럼 독일, 러시아 등의 강대국에 곁에서 힘들게 , 근근이 버틴 나라인가보다 했다.
영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보면서 우리만이 아니었구나 생각했던 것처럼.. 끼인 나라들은 같은 경험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졌다.
일제 안에 여러 행동양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우리의 조상들이 저절로 떠오르고, 그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인간이 사는 모습이 별 다를 것이 없어서...
저 멀리 존재도 느끼지 못한 나라의 연극을 보면서 역사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작품들도 그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비슷한 배경과 상황도 공감을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 더욱더 공감한 부분은 인간이다.
우선 등장인물들을 생각해 본다.
바실리에는 세상의 중심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사는 인물이다.
세상은 의지와 신념을 가졌으나 삶이 연속되면서 그의 대사처럼 무대 밖에서는 벌벌 떠는,
그래서 점점 이상이 마모되어 현실적이 되어가고, 타협적이 되는 인물이다.
타협을 하고 퇴색됨을 스스로 느끼지만 그가 하는 최선은 무대를 지키는 일이었고, 그 점에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엘리사베타는 세상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바실리에나 필립, 그리고 소피아 등의 인물들에 대해 정확한 눈을 가지고 그들의 설명하고 남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어느 공간을 메워준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세상과는 좀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엘리사베타에게 물어보면 될 듯 하다.
소피아는 입문자이다.
배우가 아름답다는 것은 배우감이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소피아는 연극을 사랑하다.
배우는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상황과는 상관없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죽음의 위험에 몰려있을 때는 연극으로 모면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배우들과 함께 하는, 서툴러 보이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그래서 시간을 좀 들여야 인물이다.
필립은 그야말로 문제적 인물이다. 문제는 충돌상황에서 발생한다.
다른 인물들은 필립에게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지만 어쩌면 필립이야 말로 현실을 직시하기에 충돌했다고 본다.
그는 극적인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빨랫줄 뒤에서, 나무 뒤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서... 사람들의 상황을 바라보고 나무칼을 들고 움직인다. 그가 던지는 대사는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처음에는 연극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도 다 대입이 가능하구나 생각했지만, 그것은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쓴 작가가 배우를 통해서 현실을 거울처럼 보여준 것이다. 필립은 작가의 거울 같은 존재이다. 결국 충돌하는 자는 깨어진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깨어진 것들에 의해 발전하고, 생명체는 깨어진 것들에 의해 진화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심카가 보통의 우리와 가장 닮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군인의 아내라는 허영과 세쿨라와의 떳떳하지 못한 사랑에 아파하고, 배우를 이해하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언제나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같다. 현재가 싫어서 술로 세상에서 도망가는 블라고예, 살아야하므로 노동하는 기나, 그들의 앞잡이, 그리고 악으로 맞서는 동네주민들... 인간군상들이다.
마지막 한 사람 드로바츠, 인간은 아름다운 것에서 출발했으므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잠재되어 있다.
아무리 악인이더라도. 드로바츠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에서 어린 시절 산에서 아름다운 들꽃을 보았던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더욱 과장되게 추하게 보인다.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극도의 추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희곡대본을 읽어야겠다는 강력한 생각이 든 까닭은 이 연극의 대사들이 마치 연극배우만의 이야기,
연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날 연극을 볼 때는 앞줄에 앉아있었던 까닭에 배우들의 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연극에 관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연극의 절박함, 혹은 운명적인 것에 대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배우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코러스를 맡은 마을 주민 여자 배우들조차도 그랬다. 난 그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연극안의 배우들만이 아니라, 전쟁 중은 아니지만,
치열한 이 시대에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도 전쟁 중에 연기를 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극만이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 쟝르라는 것이 치열한 사회가 되면 될수록 필립처럼 마치 딴 세상에 사는 사람인 듯,
미친 사람인 듯 스스로 최면을 걸어가며 버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 걸수록, 우리는 신들린 듯이 연기를 한다고 한다.
배우가 신들린 듯 연기를 하면 무당이 죽은 사람의 귀신을 불러와 그 사람이 되어 산사람들과 만나게 해주듯,
배우 또한 세상에 없는 인물을 관객들에게 끌어다놓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것은 영매같은 것이구나.
그럼 옛날 굿판도 한판 연극이었겠구나.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아닌가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니?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진다. 사랑하는 것일뿐 그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접신을 거부한 것 일수도 있다.
마지막 부분의 대사이다.
50미터만 더 가면 우리는 아마 영국땅에 있죠! 5분만 지나면 우린 16세기에 도달할 거예요!
이렇게 행복하다 말해놓고, 그것이 행복이 아님을 고통을 수반한 내림굿을 받는 무당처럼.... 뒤이어 말한다.
황페한 땅을 가로질러,
눈물로 가득 찬,
우리는 나무칼을 들고
불 속으로 떠난다네!
황페한 땅을 가로질러,
눈물로 가득 찬,
우리는 나무칼을 들고
불 속으로 떠난다네!
황페한 땅을 가로질러,
눈물로 가득 찬,
우리는 나무칼을 들고
불 속으로 떠난다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은 자신에 겨워 눈물을 그렁거린다. 이 대사에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 시인에게, 어느 화가에게, 어느 소설가에게...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적어도 이 연극을 보던 시간동안에는 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 마음이 흔들리면,
마치 어린 무당이 자신의 신아비를 만나러 가듯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의 대본을 읽어야겠다.
'보는대로 戱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동예술극장] 멕베스 (0) | 2014.03.20 |
---|---|
[명동예술극장] 벽속의 요정 (0) | 2014.02.18 |
[명동예술극장] 오이디푸스 (0) | 2011.02.11 |
[명동예술극장] 리어왕 (0) | 2010.06.16 |
[영국] 광부화가들 (0) | 2010.05.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