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저 | 북인 | 2008년 02월
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그래서 우산을 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는 아침.
오지 않는 듯이 소리로만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받쳤다.
소리만 들리고 비는 보이지 않았다.
20분도 되지않게 타는 전철 안에서 [찔레]시집을 읽으며
오지 않는 듯이 내리는 비를 여전히 우산으로 받치고 있는 듯 했다.
중견시인의 오래된 시집을 재발간한 것이라고 했다.
한 가지 일을 계속한 사람의 그 처음한 때의 기록, 그것은 과거.
잠시 현재의 시인은----->저기
테라스의 여자
문정희
마지막 화살을 쏘아버린 �한 눈을 하고
긴 손톱으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칼
주름 진 입술에 붉은 술을 붓는 여자
쉬운 결혼들, 그보다 더 쉬웠던 이혼들
그러나 모든 게 좋아
가끔 외롭지만 그것도 좋아
그 많은 상처와 그 많은 고백들은
무슨 꽃이라 부르는지 몰라도 좋아
덧없는 포옹, 바람처럼 사라진 심장 소리
말하자면 통속이지만
그 아픔이 모여 인생이 되지
도깨비비늘처럼 달라붙을까 봐
날렵한 농담으로 피해 가는 뒷모습들 바라보며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테라스의 여자
생전 처음 만났는데
어디선가 많이도 보았던
수많은 저 여자
문정희 시인의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중 감히 '나 닮은 여자'라고 규정했던 문정희 시인의 [테라스의 여인]
이 시를 읽고 일기를 썼던 것이 기억나 찾아 옮겨본다.
-----2006.10
전 테라스에 서서 그녀를 읽고 있습니다.
바스락거리는 그녀에게 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장미?
카네이션?
백합?
어쩐지 아닙니다.
난 그녀를 위해 핸드메이드플라워를 만들기로 합니다.
이름도 없는,
온갖 색으로 물들인 헝겊으로 꽃잎과 초록잎을 만들고,
철사에 초록종이테이프를 감아 줄기를 만듭니다.
흐드러지게 핀 이름없는 꽃을 만들어 그녀의 테라스에 선물하고 싶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지 않는,
한번씩 그녀가 툭 치더라도 떨어지지 않는,
그녀가 바스락거릴때마다 같이 바스락거려주는,
그런 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비의 사랑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을 틔우고 싶다
희망이라 말한다.
아직 그대라고 부르며, 나의 그대와 꿈을 꾸는 시간이다.
아직 그대는 그대가 내 옆에 있기만 하면 지금과 다른 나의 삶을 꿈꿀 수 있는 신기루이다.
과거의 시간은 희망을 품었던 시간이다.
희망으로 살아갔던 시간이다.
어느 한 순간,
깨어난 꿈처럼 한 개의 굵은 마디를 만들며 희망이 과거가 되었다.
지금 내가 사는 마디엔 희망이 없다.
희망은 사랑이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며, 그대라는 말의 바리케이드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이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내가 찔레꽃을 처음 본 것은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부모님과 할아버지 산소를 간 날이었다.
산소를 올라가는 작은 둔덕에 핀 하얗고 작은 꽃.
무심히 지나가는 나의 뒤에서 흘리듯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
"올해는 찔레가 참 이쁘게 피었네."
"뭐가 찔레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서야 난 찔레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찔레는
청승스럽고 천해 보일듯한
꽃분홍색에 꽃잎이 조금 두꺼워 진물이 떨어질듯한
가지가 부러질 듯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이 불면 바람따라 꽃잎이 펄펄 날릴듯한
...
그런 꽃이었다.
아마 이건 우리의 국민뽕짝 '찔레꽃 붉게 피는...남쪽나라.." 그것 때문일것이다.
그날 내가 본 찔레는 하얗고, 작고, 여리고, 야무지고.... 모른척하고 ...
지금 난 사랑을 가지지 않다.
부,모,형,제... 그리고 그...또 다른 그... 또 다른 그....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있었으나 난 지금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내가 가능할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산소를 오르다 만난 그 찔레도 지금은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는 듯 싶었다.
마치 온 몸에서 꽃으로 피워낼 수 있는 기운이라는 기운은 다 빌어 딱 한 송이 그것도 얇고 작게.. 스쳐가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피우고는
꽃보다 더 큰 가지를 온 몸에다 꽂아두었다.
이제는 다치지 않겠다.
찔레에서 보이는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뿐이다.
뒤돌아서 나를 보면 어김없이 목에 돋아난 가시가 돌아보지 말라고 찔러댄다.
목에 가시가 돋았다.
돌아볼 수 없다.
찔레야 찔레야....
바닥
나는 바람이 나서 어느 날
대양 한가운데까지 떠밀려 갔다
이 세상 온갖 해를 씻어 올리는 곳이었다
맨몸뚱이로 바닥에 가라앉았다
우울의 끝의 끝, 참패와 고독으로
나 뒹굴었다. 뼈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탕아처럼 돌아가리라
이왕이면
이 세상 처음인 길로 가리라
떠나 본 사람은 안다.
패키지가 아니라 배낭 하나 메고 깊은 밤 공항에 던져진 사람은 안다.
세상의 처음이 그랬음을...
세상의 마지막이 그러할 것임을...
세상의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닌데 공항에 던져진 사람은 세상을 잘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처음과 끝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사람이다.
깊은 밤 공항에 던져진 사람은 안다.
누런 이를 앞으로 드러내고 어디고 갈거냐는 질문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여행자의 거리로 데려다 달라고.. 딱히 어디라고 말할데가 없었던 사람은 안다.
텅빈 세상 하나가 다시 열렸음을...
그리고 다시 살아가야 함을...
이식하려 운반하는 신장처럼 흔들지도 말고... 흥분하지도 말고 그대로 심겨줘야 하는 것을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음을 떠나 본 사람은 안다.
어느 시인
초식동물, 그는
장미와 새들에게
늘 쫓기었다
입에서 별들을
쏟아 놓으려고
늘 하얀 벙어리였다
시인,
그들은 육식 또는 초식 공룡이다.
풀먹고 살던 초식공룡은 몸집이 늘어늘어 세상에 먹을 풀이 점점 없어지자, 나눠먹을 생각 않았고... 몸집만 커져...풀 아닌 것을 먹을 궁리를 했고
할퀴며 악다구니를 쓰던 육식공룡은 발톱과 이빨을 뾰족히 세우고 덤벼들어 싸우고자 하였으나... 세상은 제풀에 삭았다. 발톱과 이빨이 퇴화되었고
시인은 공룡박물관 안에서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이 나란히 폼나게 서있다.
지금 공룡은?
티라노사우루스, 벨라키라톱스....그런 육식공룡
아파토사우루스, 트리케라톱스...그런 초식공룡
없고 정체성 사라진 잡식공룡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들을 공룡이라 부른다.
초식공룡의 거대한 몸집으로 육식공룡의 사나움으로 진액이라고는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인간의 ... 남은 진액을 핥고 있다.
공룡은 쥬라기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다.
그 곳에 가면 공룡들이 살아있다.
활판시대.
며칠 전부터 김종삼을 다시 읽는다.
김수영의 깊은 눈이... 보지 않았는데도 그립다.
소포
이곳에 제일 흔한 거 하나 싸 보낸다
불고기가 햄버거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자유
햄버거가 불고기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자유
여름에 겨울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겨울에 여름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너는 내 애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나는 그의 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박수를 칠 수 있는 자유
박수를 안 칠 수 있는 자유
아우야, 다행히 너무 가벼워서
우편요금도 싸구나. 그런데
보내는 마음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구나. 낯선 거리를 아무리 걸어 봐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다
혹시 수치거절이나 하지 않을까 저어되는구나
잘 받았다고 속히 답해 다오
미국에서 누이가
자유....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스스로에서 출발하는 것이 자유이다.
내 안에서 방향을 결정하여 세상을 향해 쏘아지는 것, 그것이 자유이다.
왜 자유를 원하는 것인지, 왜 현지 수급이 안돼.. 멀리서 공수를 해야하는 것인지.
지금이 군주국가, 공산국가, 유신, 뭣도 뭣도 아닌데 자유롭지 않다.
제어가 되지 않는 자동차는 거리를 달릴 수 없다.
멈출 수 없는 비행기는 하늘을 날 수 없다.
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다.
그런데 난 달릴 수도 없고 날 수도 없다.
그것은 말이지....
내가 멀리서 자유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는데 말이지.
자유로웠다고 말하는 그곳에서 있었던 것들을 상상하고 셋팅시키면 여기서도 자유로울 수도 있겠단 말이다.
낯설음(생소함)
말할 수 없음(침묵)
몸으로 의사표시(교감)
집중(전달농도)
이것은 내 몸이 결정체처럼 작아진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나만 남겨두면 자유는 어디서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집[찔레] 나오기를 기다렸었다.
출근길에 읽고 점심시간에 읽고... 다 읽고나니 개운하다.
마치 오래된 나의 일기를 읽으며
그 때의 문제들이 모두 풀린 지금에 안도하고,
그 때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던 난
여전히 세상속에 살아있고,
절대절명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이제,
절대절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것이라서 절대절명이라고 구분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시인에게도 시간은 흘렀고
나에게도 똑같은 시간은 흘렀다.
시인은 창이다.
어느 날은 내 안으로 창을 만들어 들여다보게 하고
어느 날은 누군가의 가슴에다 창을 만들어 누군가를 살펴보게 하고
어느 날은 발아래 납작 누워있는 풀포기에게도 창을 만들어 나를 바닥에 주저앉게 하고
오늘은 목에 돋은 가시때문에 돌아볼 수 없었던 내 뒤에다 유리창을 내어 가시에 찔리지 않고도 잠시 뒤돌아보게 했다.
이 시집을 읽은 감상문이랄까?
서정주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잠시 딴 소리로 옮겨본다.
-잠시 딴 소리-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 꽃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947.11 경향신문
-잠시 딴 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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